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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 학생들에게 전하는 홍덕률 교수님의 마지막 메세지

등록일 2021-06-13 작성자 강혜성 조회수 3637

사랑하는 대구대학교 학생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사회학과 홍덕률교수입니다. 많은 망설임 끝에 펜을 들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613일을 마지막으로 정든 대구대학교를 떠나게 되었음을 전해야 해서입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이제는 그 많은 추억과 사연을 가슴에 담고 사랑자유의 동산, 대구대학교와 사회학과 학생 곁을 떠나게 되어서입니다.

돌아보면, 저의 평생이 담겨 있는 대구대학교요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였습니다. 33년 넘게, 저의 눈물과 땀과 열정과 기도를 쏟았던 대구대학교였습니다. 대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 사회학과는 저의 전부였습니다.

19883, 서른둘의 나이에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저는 아내와 함께 경산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아들을 얻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소박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사랑하는 학생들과 함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교육자로서의 보람도 일궜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때로 잔인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19938, 제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그만 해직이 되었습니다. 이태영 전 총장님이 198810월부터 부재한 상황에서 그 부인에 의해 파행 경영되던 대학과 재단을 향해, 교수-학생들이 매년 치열하게 문제제기하던 때였습니다. 조금의 변화도 수용하지 않던 당시 재단은, 초대 직선총장 당선자와 교수협의회 총무간사였던 저를 재임용 탈락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학교를 떠나려 했습니다. 저의 고향도, 모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823, 긴급 소집된 전체 교수 비상총회(본관 L층 강당)에서 교수님들께 고별인사하고 나오던 순간이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많은 교수님들께서 저의 팔을 잡으셨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는 선배 교수님들도 여럿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교수농성장을 꾸리셨고, 저에게는 성금을 거둬 생활비를 마련해 볼 테니 남아서 함께 대구대학교를 민주화해 보자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총학생회와 학생들은 더 뜨거웠습니다. 준공을 앞두고 있던 본관에 농성장을 꾸리고, 이 부족한 교수의 해직을 철회하라고 팔을 걷었습니다. ‘비리재단 퇴진도 함께 외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사회학과 학생들은 대학민주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회학과 제자 학생들이 교수님 사랑해요’, ‘교수님 힘내세요’, ‘교수님을 복직시켜라는 손팻말을 들고 땡볕에서 시위하던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학생, 교수님들과 함께 고난의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교수님들은 제가 이듬해 복직할 때까지 매년 200만원의 성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철야농성은 그해 추석도 크리스마스도 이듬해 설날도 빠짐없이 이어졌습니다. 교수농성이 189일 되던 날인 1994222, 교육부는 임시이사를 파견한다고 발표했고 그 날에서야 고된 농성은 끝이 났습니다. 학생들의 농성은 그 후 직선총장이 취임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189일의 하루하루가 생생합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집회를 하고 단식하는 학생들까지 나타났습니다. 수업거부, 캠퍼스 침묵시위, 대구까지의 차량시위 등, 절박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강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태평이었고, 구재단을 비호하기 일쑤였습니다. 하루하루가 피말리는 고통이었습니다.

임시이사 파견 결정 소식을 접하고 농성장에서 교수님들,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감격 또한 잊지 못합니다. 글썽거렸던 학생들의 눈망울도 잊지 못합니다. 그 고통의 현장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의기투합했습니다. 저와 사회학과 학생들은 어깨동무했습니다. 짙은 어둠에 갇힌 채 손잡고 의지하며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헤쳐 갔습니다. 그때도 회유와 협박이 있었고 배신도 있었지만, 오직 교육정의 하나를 붙들고 이겨냈습니다.

임시이사가 파견된 뒤, 저와 함께 해직됐던 초대 직선총장 당선자(고 조기섭교수)는 곧바로 총장에 취임했고, 저도 6개월 뒤 사회학과 교수로 복직하였습니다.

복직하면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제, 다른 어느 대학에서 탐나는 조건을 제시하며 오라고 한들, 교수로 있는 한은, 대구대학교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구대학교에서 저의 남은 삶을 바치겠노라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 때 저의 나이 서른 여덟이었습니다.

대구대학교는 민주대학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그 뒤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물론 구재단의 복귀 기도로부터 숱한 고비와 위기가 있었지만, 대구대학교는 학생, 교수, 직원의 성숙한 대응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대구대학교가 구재단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시간이 되면, 저는 교수의 본연인 교육과 연구와 봉사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짬짬이 전국의 사학들에서 재단비리와 씨름하던 교수, 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우리나라 교육, 특히 대학교육의 민주화와 사학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도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참을 지난 뒤, 저는 뜻밖에도 총장선거에 도전할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지방 사립대학의 미래가 어둡게 전망되던 시기였습니다. 교육부에 의해, 대구대학교를 비롯한 전국의 임시이사 파견 대학들에서 재단 정상화 프로그램이 강도 높게 추진되던 시기기도 했습니다.

많이 번민했습니다. 재단정상화 프로그램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구재단 퇴진운동에 앞장서며 해직을 감당해야 했듯이, 재단 정상화를 통해 대학의 정상화와 민주화를 완성해야 하는 것 역시, 저의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설령 어떤 십자가가 주어지더라도 감당해야 할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 길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결심했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200911,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의 선택을 받아 제 10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쉰둘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4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재단 정상화는 마무리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단 분규는 더 험한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구재단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총장선거관리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수 신분이 노골적으로 위협받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저는 11대 총장에 재도전해야 했고, 교수님과 직원 선생님들은 구재단측의 고소 고발로 재판 중이던 저를 한번 더 총장으로 선출해 주셨습니다. 비공식 행사이긴 했지만, 학생 자치기구 임원들의 총장후보 초청 토론회 및 투표에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두 차례의 총장 재임 기간 동안, 대구대학교가 당면한 과제들을 붙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를 믿고 총장직을 맡겨주신 대학구성원들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저는 오로지 대구대학교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대구대학교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쳐 쓰러진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특히 다음의 세 가지 과제를 저는 저의 역사적 임무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교수, 학생, 직원, 동문의 뜻을 최대한 반영해 민주적 재단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대학경영의 패러다임을 재단-총장-교수-직원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돌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교육철학이기도 했지만, 대구대학교의 미래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의 그러한 교육철학을 학생이 행복한 대학이란 슬로건에 담았습니다. 셋째는, 취약한 대학지표를 개선해 대학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그 위에서 국가사업을 유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국가사업은 취업 지원, 산학협력 지원, 창업 지원, 교육혁신 사업 등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재정이 취약한 지방 사립대학으로서,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학생들의 진로 개척을 지원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괴로웠던 날도 참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일은 구재단측으로부터의 도넘은 공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와 교육부와 청와대와 언론사 등에 탄원하거나 제보한 서류들에서 저를 악마’, ‘사탄으로 그렸습니다. 변호사 수임료 교비 지출 관련해 벌금 1천만원을 물게 된 사건을 빌미로, 저를 등록금 횡령범, 파렴치범으로 일간신문에 광고하기도 했습니다. 교내 포털 역시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로 도배되었습니다. 구재단측으로부터 숱한 고소 고발도 당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대학을, 또 때로는 삶을 회의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해준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 학생과 학교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저의 단심을 알아준 학생들, 멀리서 가까이서 저를 믿고 응원해준 사회학과 제자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몇 번이나 무너졌을 것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다음의 몇 장면들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민주적 재단 정상화라는 과제를 위해 서울로 시위를 떠나고 중요한 이사회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교수님들과 학생들과 직원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교육부 평가를 받기 위해, 혹은 국가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밤샘했던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땅에 떨어진 각종 지표를 관리하고, 또 한푼의 국고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마음졸이며 애썼던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오로지 대구대학교를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 하나로 고된 보직을 맡아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학생이 행복한 대학을 구현하고 대학의 내일을 열어야 한다는 같은 믿음으로, 그동안의 오랜 교수중심-행정중심 관행들까지 내려놓으며, 학생들을 위해 헌신해 주신 교수님과 직원 선생님들, 대학본부의 불편한 정책들에도 기꺼이 함께 해주신 교수님과 직원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힘들어 지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준 동문들, 그리고 학생회 임원들, 사회학과 제자들도 생각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가 어렵다고 걱정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뤄나갔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가사업을 따낼 때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학생들이 학교가 제공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고마워할 때마다 얼마나 보람 있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 민주적 정이사 체제로의 민주적 전환을 달성했을 때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 아팠던 추억과 더없이 기뻤던 보람을 뒤로 하고, 이제 저는 대구대학교를 떠납니다.

저는 내일, 614일부터 교육부 산하의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새 삶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전국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사립학교들을 지원하는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입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고 또한 걱정도 적지 않습니다만, 무엇보다도 33년 넘게 저의 모든 열정을 쏟은 대구대학교와 사랑하는 학생들 곁을 떠나는 것이 섭섭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오랜만에 사회학과 평교수로 돌아온 저를 따뜻하게 맞아준 사회학과 학생들을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사회학과 학생들과 다시 만나 지낸 지난 2년의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떠나서도, 사랑하는 대구대학교 학생들의 행복과 발전을, 특별히 사회학과 학생들의 꿈을 응원할 것입니다. 학령인구 급감 시대에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겠지만, 대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 사회학과가 계속 발전해 가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 사회학과는 그동안 숱한 과제와 어려움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저력있는 대학이고 학과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코로나19로 인해 불편한 상황이기도 해서 이렇게 떠나게 된 것,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저 역시 대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에서의 33년 생활 중, 아름답고 기뻤던 기억들만 가지고 떠나려 합니다.

그동안 학생들은 저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사랑하는 학생들로 인해 너무 행복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사회학과 학생들의 건강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21. 6. 13.

사회학과 교수 홍 덕 률 드림.